헌책방에 갑자기 '큰손'이 나타났다? AI가 종이책을 사들이는 이유

요즘 서점가에 이상한 손님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분야도, 저자도, 출간 연도도 따지지 않고 "있는 책 전부 한 권씩 보내주세요"라고 주문하는 손님이죠.
처음엔 "웬 횡재냐" 싶었던 서점 주인들도 주문이 반복되자 고개를 갸웃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 의심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하네요.
"이거... AI 학습용으로 사 가는 거 아니야?"

전 세계 헌책방에 들어온 수상한 주문
1) 영국 – 일주일 치 판매량이 단 한 건의 주문으로
영국 노섬벌랜드에 있는 유명 헌책방 '바터 북스(Barter Books)'는 보통 일주일에 2,000~3,000권 정도를 판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한 캐나다 업체의 주문 한 건이 그 일주일 치 판매량과 맞먹었다고 해요.
더 이상한 건 주문 내용입니다.
보통 대량 주문은 스포츠, 자동차처럼 주제가 정해져 있는데...
이번 주문은 에스토니아어 소설, 19세기 고전, 1980년대 군함 잡지가 한 묶음에 섞여 있는 식이었다고 합니다.
주인이 "완전히 무작위"라고 표현할 정도였죠.
2) 캐나다·네덜란드·독일 – 같은 이름이 반복된다
캐나다 토론토의 헌책방들에도 비슷한 주문이 들어왔고,
네덜란드와 독일의 고서점에서는 전문 학술서나 희귀본을 콕 집어 사 가는 주문이 이어졌습니다.
여러 나라 서점 주인들의 증언에서 '책 재활용 업체'를 자처하는 같은 캐나다 회사 이름이 반복해서 등장한다고 하네요.
3) 일본 – 전문서적이 불티나게
일본에서도 지난여름 무렵부터 철학·역사·의학·법률 같은 전문서적 대량 주문이 각지 헌책방에 잇따랐습니다.
일본 대형 도서 유통사 한 곳은 판매 전 구매 목적을 확인했지만 AI 학습용인 줄은 몰랐다고 밝히기도 했어요.
4) 그리고 우리나라 – 교보문고에 "10만 종, 한 권씩"
이 바람이 결국 한국까지 불어왔습니다.
- 보문고* : 미국·영국 업체로부터 "분야 상관없이 약 10만 종을 한 권씩 사겠다"는 메일을 받았습니다. 구매 목적과 최종 납품처를 물었더니 답변이 명확하지 않아 거래하지 않았다고 해요. 납품처 중에는 데이터 관련 기업도 있었다고 합니다.
- 예스24 : 대량 구매를 원하는 업체와 직접 미팅까지 했지만, 책을 어디에 쓸지는 끝내 설명하지 않았고 이후 연락이 끊겼다고 합니다.
- 알라딘 : 캐나다의 중고책 유통사가 대량 구매를 문의했지만, 해외 업체가 한국어 원서를 이렇게 산다는 게 의아해서 계약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반면 이미 거래가 이뤄진 곳도 있었습니다.
국내 대형 도서 유통사 웅진북센은 2024년 앤트로픽과 계약을 맺고 2025년에 책을 공급했다고 밝혔습니다.
선적 기록상으로는 수백~수천 박스 단위로 미국 물류업체에 보내졌다고 해요.
당시엔 AI 학습 문제가 잘 알려지지 않아 일반 거래로 생각했고, 앞으로는 AI 업체로 갈 수 있는 거래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종이책'일까?
AI 시대에 낡은 종이책이라니, 조금 의외죠?
하지만 이유를 알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1) "AI 때가 묻지 않은 글"이라서
2022년 말 챗GPT가 나온 이후로
인터넷에는 AI가 쓴 글이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문제는 AI가 AI가 쓴 글을 계속 학습하면
품질이 점점 떨어지는 '모델 붕괴(Model Collapse)' 현상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2024년 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연구에서도 이 점을 경고했죠.
그래서 2022년 이전에 출간된 책, 즉 '순수하게 사람이 쓴 글'의 몸값이 올라가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AI 기업에 책 대량 구매를 중개하는 한 데이터 업체는 이 점을 대놓고 홍보 문구로 쓰고 있다고 하네요.
2) 인터넷에 없는 지식이 들어 있어서
오래된 전문서, 지역사, 절판된 학술서에는 웹을 아무리 긁어도 나오지 않는 지식이 담겨 있습니다.
게다가 편집자의 손을 거쳐 정리된 글이라 문장 품질도 높죠.
앤트로픽 공동 창업자 중 한 명도 책으로 학습하면 AI가 인터넷 말투 대신 '잘 쓰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취지로 말한 것이 법원 제출 서류에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3) 법적으로 '안전한 길'이라서 (사실 이게 핵심!)
여기에는 미국 법원의 판결이 큰 영향을 줬습니다.
이 부분은 조금 자세히 볼 필요가 있어요.
앤트로픽 '프로젝트 파나마'와 바츠 소송
2024년 미국 작가 안드레아 바츠 등은 AI '클로드'를 만든 앤트로픽이 허락 없이 자신들의 책을 학습에 썼다며 집단소송(바츠 대 앤트로픽)을 냈습니다.
소송 과정에서 두 가지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첫째, 해적 사이트에서 책을 내려받았다.
앤트로픽은 라이브러리 제네시스(LibGen) 같은 불법 공유 사이트에서 수십만 권의 전자책을 다운로드했습니다.
둘째, 종이책을 사서 뜯고, 스캔하고, 버렸다.
'프로젝트 파나마'라는 이름으로 종이책을 대량 구매한 뒤 제본을 잘라내 스캔하고 원본은 폐기했다고 합니다.
2025년 6월, 미국 연방법원(윌리엄 앨섭 판사)은 이 두 가지를 다르게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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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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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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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 산 종이책을 스캔해 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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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이용(Fair Use)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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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사이트에서 받은 책 보관·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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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이용 아님 → 재판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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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앤트로픽은 해적판 문제로 작가들과 15억 달러(약 2조 원) 규모로 합의했습니다.
작품 한 권당 약 3,000달러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합의 대상 목록에 한강의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흰』을 비롯해 김영하, 신경숙, 김애란, 황석영 등 한국 작가 작품도 20여 권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한국문학번역원이 해당 작가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지원에 나섰다고 해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훔쳐서 쓰면 안 되지만, 사서 쓰면 괜찮다."
미국 법원이 사실상 이런 길을 열어준 셈이고, AI 기업들이 너도나도 헌책방으로 향하게 된 거죠.
책값에 물류비, 스캔 비용까지 더해도 출판사와 일일이 라이선스 협상을 하는 것보다 훨씬 싸고 빠르다고 합니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아마존도 라스베이거스의 한 시설에서 책을 대량으로 받아 책등을 자르고 스캔한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아마존은 "제품과 서비스 개선을 위해 책을 구매한다"고만 밝혔다고 하네요.
그럼 "사서 학습시키면" 정말 괜찮은 걸까?
바로 여기서 논란이 시작됩니다.
1) 출판계: "책을 산 것과 학습할 권리는 다르다"
책 한 권을 샀다고 해서 그 책을 복제하고 디지털화할 권리까지 산 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국내 저작권 전문가들도 헌책을 사는 것 자체는 적법하지만, 스캔·복제해 AI 학습에 쓰는 권리까지 얻는 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더 큰 문제는 내 책이 학습에 쓰였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작가와 출판사가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보상을 요구하기도 어렵죠.
그래서 최근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는
저작권자 동의 없는 AI 학습을 규제해야 한다는 '프랑크푸르트 호소문'이 나왔고,
우리나라 출판계도 이에 연대하는 '대한민국 호소문'을 발표했습니다.
요구 사항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 학습 데이터 투명성 확보
- 창작자 이용 허락 원칙
- 정당한 보상
2) AI 업계: "사람이 책 읽고 배우는 것과 같다"
반대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AI가 책을 '읽고' 패턴을 배우는 건 사람이 독서를 통해 지식을 쌓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거죠.
미국 법원도 학습 자체는 원저작물을 대체하지 않는 '변형적 이용'이라고 봤습니다.
또 절판된 책은 출판사가 다시 찍을 수 있고,
AI 기업 때문에 책값이 올랐다는 증거도 없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3) 나라마다 기준도 제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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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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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적인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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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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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이용 여부를 사안별로 판단 (구매본 학습은 인정 사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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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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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법상 정보 분석 목적 이용에 비교적 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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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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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데이터 마이닝 허용하되 저작권자가 거부(opt-out)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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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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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용 복제에 원칙적으로 저작권자 허락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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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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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규정 없이 '공정 이용' 조항에 기대는 상황, 제도 정비 논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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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이라도 어느 나라에서 학습하느냐에 따라 합법과 불법이 갈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4) 그리고 또 하나, '책이 사라진다'
저작권과는 별개로 문화유산 문제도 있습니다.
스캔 후 원본을 폐기하는 방식이라면 몇 권 남지 않은 희귀본이나 저자 서명본도 사라질 수 있겠죠.
그래서 일부 고서점은 희귀본 판매를 아예 거부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국내에서는 한 학자가 이 현상을 '모델 제국주의'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100년 넘게 쌓아온 지식이 헌책이라는 '원료'로 싸게 빠져나가고, 해외 AI로 가공된 뒤 유료 서비스라는 '완제품'으로 되돌아온다는 비유죠.
마무리하며...
AI가 똑똑해지려면 좋은 글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글은 여전히 사람이 쓴 책 속에 있죠.
결국 질문은 하나로 모입니다.
"그 책을 쓴 사람에게는 무엇이 돌아가는가?"
책을 정당하게 샀다는 것만으로 충분한지, 아니면 작가에게 따로 허락을 받고 보상해야 하는지는
아직 세계 어디에서도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분명한 건,
지금처럼 '누가, 무엇을, 얼마나' 학습했는지 모르는 깜깜이 상태로는 창작자도, AI 기업도 서로 믿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학습 데이터 공개와 합리적인 보상 체계가 AI와 출판이 함께 살아가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다음에 헌책방에 들르면 책장 한쪽이 휑하게 비어 있는 이유가... 혹시 AI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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